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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1. 11世 〉19. <태사공>임실현감공묘갈명(任實縣監公墓碣銘)
1. 문헌 목록 〉11. 11世 〉21. <태사공>성균생원공휘사의묘갈명(成均生員公諱思義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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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태사공>생원공수억비명(生員公壽億碑銘)
<태사공후>생원공수억비명(生員公壽億碑銘) 公諱壽億字仁佑姓貫淳昌世爲郡人遠祖諱璵在麗朝官至侍中平章事歷數通顯公曾祖諱順孫祖諱勣敎安陰縣監考諱玉汝業儒不成妣草溪鄭氏忠佐衛司正思仁之女戶曹參議虔其四世祖也至德戊辰十二月戊午生公生爲秀異早劬學屬有文聲鄕邑間每大比試額冬夏課選輒中無闕一時輩流皆推先不敢齒 嘉靖辛未俱捿生員進士兩傍連遊國庠不遇而退居于鄕校子弟諄諄不怠專爲程式計寺正君幼聰明能文公曉之曰士之立身當先行而後文不然雖才名冠一時何足貴哉汝其戒之公天姿粹美不屑切於操存言動無遇差性又嚴毅不苟合於人群居未嘗有諧謔笑浪人望之皆敬畏不肆又於雜藝無所好又不傳弈以射者男子之事時不厭爲之家本淸貧不以營殖累其心故於人武所競人亦無怨言與外弟河西金麟厚小同業相親愛動必與偕徵有失峻責不饒金亦受而無忤及公之歿有輓詩人篇極其傷悼其契誼之篤如此公少失所恃事繼妣一如所生撫敎諸弟使之成立人皆頌其不違志焉嗚呼以文學譽至之重使之有遇於當世則其就可量哉顧不位其年而沒地天將蓄止不發以大嗣胤之施也耶 嘉靖戊申三月甲辰病終于第去生世纔四十一以是年十二月丙寅葬于郡治之西朋砧之原訓導公之兆次也夫人趙氏同郡人球之女夫人性仁明識事理孝奉一親逮順舅故俱得其歎心又務周急不計空乏治門內勤績紝佛以年邁少懈寺正君早擢巍科出入薇垣栢臺夫人備享其榮又遞養五邑卒于錦山郡衙實 萬曆甲戌三月乙未也得壽七十四祔葬公兆而左右焉生二男二女長惟咸惟誠 即寺正君也女歸前部將朴有恒次歸前部將李盛根惟誠生二男長禛次袺弱冠時從公遊佯宮今己三十餘年矣又與寺正君忝有契好雖謂之得交父子間可也今君也銘墓爲請重有感而不忍辞銘曰肅然其容蔚然其才若本以爲胡遽中嶊蓄而不宣而有斯子其又爰感雙塚俱峙 玉溪 盧禛 謹撰 생원공수억비명(生員公壽億碑銘) 공의 휘는 수억(壽億)이요 자는 인우(仁佑)며 성관은 순창조씨인데 고려 시중평장사 휘 여(璵)를 원조로 대를 이어 작록이 련면하였다. 증조의 휘는 순손(順孫)이요 조의 휘 적교(勣敎)는 안음 현감이며 고의 휘 옥여(玉汝)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였고 비는 초계정씨 충좌위사정사인지녀(妣草溪鄭氏忠佐衛司正思仁之女)로 호조참의 건(虔)이 그 四세조였다. 一五○八(正德戊辰)년 十二월 무오(戊午)에 공이 출생하였는데 나면서 빼어나고 달라 일짝 학업을 힘써 성문이 있고 향읍간 시험에 빠짐없이 합격하니 동료가 다 선배로 추증하고 감히 나이로 대접 아니 하였다. 가정신미(嘉靖辛未)년에 생원 진사 두 시험에 함께 합격하여 련해서 태학에 놀았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고 고향에 퇴거하여 힘을 다하여 자제를 가르치며 과거 공부를 시키니 사정(寺正)군이 어려서부터 영민하여 문장에 능한지라 공이 타일러 가로되 선비가 몸을 세울 때 행실을 먼저 한 뒤에 학문을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비록 재주와 이름이 한때에 출중하나 어찌 족히 귀하겠느냐. 너는 삼갈지니 다 공의 자질이 맑고 아름다워 가벼이 보지 않고 몸가짐을 삼가하며 언동이 틀림이 없고 성품이 또 엄정하여 사람과 어울리지 않고 여러 아이와 희롱치 아니하니 사람이 다 공경하였다. 또 잡기를 좋아한 바 없어 바둑과 장기를 두지 않았으나 활쏘기는 남자의 일이라 하여 때로 싫지 않게 하였다. 집이 본디 가난하나 재물을 모을려고 마음을 더럽히지 안한고로 사람과 다툰 바 없으니 원망한자 없었다. 외종제 하서 김인후(河西金麟厚)로 더불어 젊어서 학업을 같이 하며 서로 친애하여 동작을 반드시 함께 하되 작은 과실을 용서없이 준책하니 하서가 어김없이 받아 들였다. 공의 별세한 뒤에 만시(輓詩) 팔년을 지어 그 슬픔을 다 하였으니 그 계의의 독실함이 이와 같았다. 공이 젊어서 자친을 잃고 계모를 소생모 같이 섬기고 여러 아우를 어루만져 가르쳐 성립시키니 사람이 다 칭송하였다. 오홉다 문학의 예송이 지극함으로써 성총(聖寵)을 얻었으면 그 진취를 가히 헤아리겠는가. 돌아보건대 벼슬 못하고 그 나이에 별세한 것은 하늘이 싼 포부를 드날리지 못하게 하고 장차 큰 자제로 하여금 베풀게 한 것인가. 一五四八(嘉靖戊申)년 三월 갑진(甲辰)에 향년 四十一세로 별세하니 그해 十二월 병인(丙寅)에 근서붕침의 언덕 훈도공 묘소(郡西朋砧之原訓導公墓) 아래 장사하였다. 부인 조씨는 동군사람 구(球)의 딸로 성품이 어질고 맑아 사리를 알아 효도로 양친을 받들더니 출가하여 시부모께 성효하여 그 환심을 얻고 또 구제를 힘쓰며 자가 군색을 헤아리지 않고 치산할 때 치산할 때 칠쌈을 부지런히 하고 년로로서 게을리 아니하였다. 사정(寺正)군이 일찍 높은 과거에 올라 사헌보에 재직함으로써 갖추어 영화를 누리고 또 五읍 진성지양을 받다가 금성군아에서 一五七四(萬曆甲戌)년 三월 을미(乙未) 에 수 七十四세로 별세하니 공ㅁ묘좌에 부장하였다. 남은 유함(惟咸) 유성(惟誠)인데 유성이 곧 사정군이요 녀은 전부장 박유황(朴有恒) 전부장 이성근(李盛根)처며 유함남은 진(禛) 결(袺)이었다. 약관때에 공을 쫓아 태학에 논것이 이제 三十여년이요 또 사정군과 계호(契好)가 있으니 비록 사귀여 놀았다 하나 부자기간이라야 옳을 것이다. 이제 군의 묘갈 청한 것이 거듭 감동한 바 있어 차마 사절치 못하고 새겨 가로되 엄숙한 그 얼굴이요 성대한 그 재주로다 肅然其容蔚然其才 써 될것이 있을것 같은데 어찌 문득 중년에 갔는고 若本以爲胡遽中嶊 싸고 베풀지 못한 자는 이 사람일세 蓄而不宣而有斯子 그 또 이에 느낀바는 두 무덤이 함께 갖추었네 其又爰感雙塚俱峙 옥계(玉溪) 노진(盧禛)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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